기다 이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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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다 이사무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1980년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에서 활약했으며, 1979년 닛폰햄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에는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탈삼진의 투수 4관왕을 달성했다.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주니치 드래건스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으며, 은퇴 후에는 야구 평론가, 시나노 그랜드세로우스 감독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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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 이사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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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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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명 | 기다 이사무 |
원어명 | 木田 勇 |
로마자 표기 | Isamu Kida |
출생지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아사히구 |
생년월일 | 1954년 6월 7일 |
신장 | 180 |
체중 | 75 |
利き腕 | 좌 |
타석 | 좌 |
수비 위치 | 투수 |
프로 입단 연도 | 1979년 |
드래프트 순위 | 1순위 |
첫 출장 | 1980년 4월 6일 |
마지막 경기 | 1990년 7월 8일 |
선수 경력 | |
경력 | 닛폰 강관 닛폰햄 파이터스 (1980 ~ 1985)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986 ~ 1989) 주니치 드래건스 (1990) |
감독/코치 경력 | |
경력 | 시나노 그랜드세로우스 (2007 ~ 2008) |
2. 프로 입단 전
요코하마 제1 상업고등학교(현 요코하마 상과대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팀인 닛폰 강관에 입단한 후 1978년에 있은 도시 대항 대회에서 팀을 준우승으로 이끄는 등 팀내 주력 선수로서 맹활약을 했다. 같은 해에 있은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히로시마 도요 카프, 한큐 브레이브스 등 3개 구단이 1순위로 지명해 추첨 결과 히로시마가 교섭권을 획득했지만 본인은 이것을 거부했다. 히로시마가 드래프트 1위 지명을 거부한 것은 기다 뿐이다.
다음해인 1979년의 드래프트 회의에서도 다시 3개 구단(요미우리 자이언츠, 닛폰햄 파이터스,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으로부터 1위 지명이 중복 되었지만 교섭권을 얻은 닛폰햄에 입단했다. 입단 교섭 당시 거주지와 주택(토지라고도 말하고 있다)을 조건으로 요구한 적이 있어 야구계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요코하마 이치쇼 고등학교(현 요코하마 상과대학 부속 고등학교)에서는 1972년 여름 선수권 현 대회에서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하타노 고와의 연장 11회 접전 끝에 패배했다. 일본 강관에 입단하여, 1977년 도시 대항 2회전에서 전전 홋카이도를 상대로 구원 등판하여 패배했지만 호투를 펼쳤다. 1978년 동 대회에서는 에이스로 성장하여 3경기 연속 완투 승리를 거두고, 준결승에서는 구원 등판하여 혼다 기연 스즈카를 꺾었다. 결승에서는 도고의 구로가미 요시히로와 맞붙었지만 0-4로 완봉패. 준우승에 그쳤지만, 동 대회 구지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제25회 아마추어 야구 세계 선수권 일본 대표로도 선출되었다.
같은 해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다이요, 히로시마, 한큐 3개 구단이 1위 지명. 추첨 결과, 히로시마가 교섭권을 얻었지만 이를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다이요 입단을 강하게 희망했기 때문이라고 보도되었지만, 실제로는 재경 세 리그라면 어떤 구단이라도 응할 생각이었다. 그 이유로 아버지가 위암, 어머니가 담석을 앓고 있어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제대로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네가 원하는 길을 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고, 본인도 드래프트 1위 지명을 명예롭게 생각했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도저히 요코하마를 떠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3] 히로시마의 드래프트 1위 지명을 거부한 인물은 기다뿐이다. 다음 1979년 도시 대항에서도 활약하여, 제4회 인터컨티넨탈컵 일본 대표로 선출되어 일본의 준우승에 공헌했다.
197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도 다시 3개 구단 (요미우리, 니혼햄, 다이요)의 1위 지명이 중복되었지만, 교섭권을 얻은 니혼햄에 입단했다. 니혼햄이 제비를 뽑았을 때 "나는 운 없는 남자다"라고 푸념하며,[4] 입단 교섭에 있어서 조건으로 주택(토지라고도 한다)을 요구했다고 전해진 것도 화제가 되었다.
2. 1. 고교 시절
요코하마 제1 상업고등학교(현 요코하마 상과대학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여름 선수권 현 대회에서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하타노 고와의 연장 11회 접전 끝에 패배했다.사회인 야구의 일본 강관에 입단하여, 도시 대항 2회전에서 전전 홋카이도를 상대로 구원 등판하여 패배했지만 호투를 펼쳤다. 동 대회에서는 에이스로 성장하여 3경기 연속 완투 승리를 거두고, 준결승에서는 구원 등판하여 혼다 기연 스즈카를 꺾었다. 결승에서는 도고의 구로가미 요시히로와 맞붙었지만 0-4로 완봉패. 준우승에 그쳤지만, 동 대회 구지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제25회 아마추어 야구 세계 선수권 일본 대표로도 선출되었다.
같은 해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다이요, 히로시마, 한큐 3개 구단이 1위 지명했으나, 추첨 결과, 히로시마가 교섭권을 얻었지만 이를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다이요 입단을 강하게 희망했기 때문이라고 보도되었지만, 실제로는 재경 세 리그라면 어떤 구단이라도 응할 생각이었다. 그 이유로 아버지가 위암, 어머니가 담석을 앓고 있어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제대로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네가 원하는 길을 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고, 본인도 드래프트 1위 지명을 명예롭게 생각했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도저히 요코하마를 떠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3] 히로시마의 드래프트 1위 지명을 거부한 인물은 기다뿐이다. 다음 도시 대항에서도 활약하여, 제4회 인터컨티넨탈컵 일본 대표로 선출되어 일본의 준우승에 공헌했다.
197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도 다시 3개 구단 (요미우리, 니혼햄, 다이요)의 1위 지명이 중복되었지만, 교섭권을 얻은 니혼햄에 입단했다. 니혼햄이 제비를 뽑았을 때 "나는 운 없는 남자다"라고 푸념하며[4], 입단 교섭에 있어서 조건으로 주택(토지라고도 한다)을 요구했다고 전해진 것도 화제가 되었다.
2. 2. 사회인 야구 시절
기다는 요코하마 제1 상업고등학교(현 요코하마 상과대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팀인 닛폰 강관에 입단했다. 1978년 도시 대항 대회에서 팀을 준우승으로 이끄는 등 주력 선수로 활약했다. 같은 해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히로시마 도요 카프, 한큐 브레이브스 3개 구단이 1순위로 지명했지만, 추첨 결과 히로시마가 교섭권을 획득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히로시마의 드래프트 1위 지명을 거부한 유일한 선수이다.197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도 다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닛폰햄 파이터스,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3개 구단으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았지만, 교섭권을 획득한 닛폰햄에 입단했다. 입단 교섭 당시 거주지와 주택(토지)을 조건으로 요구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요코하마 이치쇼 고등학교(현 요코하마 상과대학 부속 고등학교) 시절, 1972년 여름 선수권 현 대회에서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하타노 고에 패했다. 일본 강관에 입단하여 1977년 도시 대항 2회전에서 전전 홋카이도를 상대로 구원 등판하여 호투했다. 1978년 동 대회에서는 에이스로 3경기 연속 완투 승리를 거두고, 준결승에서 혼다 기연 스즈카를 꺾었다. 결승에서는 도고의 구로가미 요시히로에게 완봉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구지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제25회 아마추어 야구 세계 선수권 일본 대표로도 선출되었다.
197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다이요, 히로시마, 한큐 3개 구단이 1위로 지명했으나, 히로시마의 교섭권을 거부했다. 요코하마 입단을 희망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재경 세 리그 구단이면 응할 생각이었다. 부모님의 건강 문제로 요코하마를 떠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979년 도시 대항에서 활약 후, 제4회 인터컨티넨탈컵 일본 대표로 준우승에 공헌했다.
197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다시 3개 구단의 1위 지명을 받았고, 니혼햄에 입단했다. 닛폰햄이 제비를 뽑았을 때 "나는 운 없는 남자다"라고 푸념했으며,[4] 입단 조건으로 주택(토지)을 요구했다가 오야시 타다시 구단주의 설득으로 단념했다.
3. 프로 선수 시절
1980년에는 22승(17선발승으로 니시나 도키나리, 히가시오 오사무와 선발승 공동 1위) 8패 4세이브, 225탈삼진, 평균자책점 2.28, 7할 3푼 3리의 승률을 기록하는 등 경이적인 시즌 성적으로 투수 부문의 타이틀을 모두 독점했다.[12] 후기 우승을 다투는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최종전에서 팀은 패해 우승을 놓쳤지만 신인왕, 그리고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신인 선수로서 MVP로 선정되었다. 당시 그 해의 퍼시픽 리그에서는 3개 팀이 시즌 200홈런을 기록하는 등 리그 전체 1196홈런이라는 굴지의 타격 성적을 기록한 해였으며, 1년 간의 성적이 22승, 평균자책점 2.28은 경이적인 성적이라고 볼 수 있다. 기다에게 끌려가도록 하듯이 그 해 닛폰햄은 퍼시픽 리그 6개 팀 중 유일하게도 팀 평균자책점이 3점대(3.61)를 기록했다. 신인으로서의 최다 탈삼진은 1967년의 에나쓰 유타카, 퍼시픽 리그에서는 1954년의 다쿠와 모토지가 기록한 이래의 쾌거였다. 매회 탈삼진을 시즌 3회 기록하고 있어 이것은 에가와 스구루(1981년)와 대등한 프로 야구 기록이다.[5]
시범 경기부터 2승으로 순조롭게 출발했으며, 개막 2차전에 선발 출장하여, 세이부를 상대로 7안타를 맞았지만 완투 승리를 거두었다. 4월 성적은 방어율 0.79, 4승 0패로 월간 MVP에 선정되었다. 헛스윙을 유도하는 속구에 크고 작은 2개의 커브를 던졌으며, 특히 우에무라 요시노부 투수 코치에게 배운 팜볼은 큰 무기가 되었다. 에나쓰 유타카와 동률인 23투구 이닝 연속 탈삼진의 일본 프로 야구 타이기록도 수립했다. 릴리프로도 등판했으며, 무사 만루 상황에서 한큐의 후쿠모토 유타카, 미노다 고지, 가토 에이지를 상대로 모두 속구로 연속 탈삼진을 잡는 묘기를 선보였다. 삼진을 잡고 하는 화려한 가츠 포즈는 이 키다가 원조라고 한다. 그러나, 9월 2일 킨테츠전에서 16안타를 맞고 5점을 뺏겨, 간신히 18승을 거두었지만 186개의 공을 던지는 고전을 하였다. 이후 홈런을 허용하기 시작했고, "공의 가벼움"이 화제가 되었다. 후기 우승이 걸린 10월 7일 킨테츠와의 최종전 (10.7 결전)에서는, 만원 관중을 모은 고라쿠엔 구장에서 3회 초 무사 2루에서 릴리프로 등판했지만, 사사키 쿄스케에게 안타를 맞고 동점, 4회 초에는 3안타를 연달아 맞고 3점을 잃었다. 커브의 제구가 잡히지 않았고, 백업의 실책도 나왔다. 8회 초에 아리타 슈조가 키다에게 솔로 홈런을 날려 6-4로 2점 뒤진 상황에서, 키다는 마운드에 주저앉아 강판되었다.[6] 경기에 패배하여 우승을 놓쳤지만, 다승, 최우수 방어율, 최고 승률을 기록하여 당시 투수 3관왕 타이틀을 독점한 것에 더해, 최다 탈삼진도 기록했다. 시즌 오프는 홍백가합전의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는 등, 텔레비전 출연과 사인회도 열어, 단숨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7]
1981년에도 시즌 10승(9선발승)을 올리는 등 팀의 후기 우승을 제패하는데 기여했고, 롯데 오리온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5차전에 선발로 등판해 승리투수가 되어 팀을 19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서 선발 등판, 히라타 가오루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여 강판당하는 등 승패는 연결되지 않았다. 올스타전에서는 1980년과 1981년에 2년 연속 팬 투표로 선정되었고 1982년은 감독 추천으로 출전했다. 개막 2차전 난카이전에 선발 등판하여 완투 승리를 거두었지만, 구보데라 유지에게 만루 홈런을 맞는 등 9실점하며 시작했다. 포수 가토 도시오에 따르면 "속구도 커브도 작년에 비해 65%", 키다 본인도 "춘계 캠프에서 달리기 훈련이 부족해서, 폼이 잡히지 않았다"라고 말했듯이, 시즌 초반부터 변화구 위주의 투구가 계속되었다. 5월 26일부터 6월 11일 경기까지 4경기 연속으로 KO 패를 당하고 말았다. 10승 10패로 끝나, 방어율은 4.77까지 악화되었다.
그러나 타 구단으로부터의 철저한 견제와 혹사의 영향으로 이렇다할 만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프로 2년차 이후 뚜렷한 활약을 볼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닛폰햄 시대의 팀메이트였던 에나쓰 유타카는 “사랑해야 할 남이었지만 자신의 형태를 너무 고집했다. 그것이 2년차 이후에 주춤한 원인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8] 닛폰햄 시절 감독 오사와 게이지는, "(1981년) 신년회에 갔더니 왠지 한 명만 새빨간 재킷을 입고 튀는 녀석이 있잖아. 순간. 엣하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지. 아니, 키다잖아. 정말. 깜짝 놀랐어. 그 전까지의 키다는 얌전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녀석이었는데. 인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변하는 건가 하고. 걔는 확실히 253이닝 정도 던졌으니까. 피로감은 상당하겠지. 오프는 그 피로를 풀고 내년에 대비해야 해. 게다가 쳐낼 수 없었던 팀은 연구하고 있으니 대처하지 않으면 안 돼. 나도 그 일에 대해 충고했지. 아침부터 밤까지 취재만 받아서 자신을 잃어버렸어. 시범 경기 즈음부터 확실히 나쁜 조짐이 나타났지. 역시 그 이후로 공의 날카로움은 돌아오지 않았어. 2년차의 조정 실패가 키다의 은퇴를 앞당겼다."라고 말했다.[9]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시절 (1986-1989) ===
1986년 가나자와 쓰구오, 오하타 도루와의 맞트레이드로 다카하시 마사미와 함께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 이적했다.[8] 그 해 시즌은 규정 이닝을 채워 8승을 올렸지만,[8] 이후 3시즌 동안 2승에 그쳤다. 다이요 재적 시절에는 1이닝 4연속 피홈런(1986년 6월 10일), 1이닝 5연속 사사구(1988년 9월 6일), 초구 선두 타자부터 3연속 피홈런(1989년 6월 4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프로 야구 타이기록을 연이어 기록했다.
===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90) ===
1990년, 기다 이사무는 가모가와 시게하루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주니치 드래건스에 이적했다.[8] 같은 해 11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8]
3. 1.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1980-1985)
1980년에는 22승(17선발승으로 니시나 도키나리, 히가시오 오사무와 선발승 공동 1위) 8패 4세이브, 225탈삼진, 평균자책점 2.28, 7할 3푼 3리의 승률을 기록하는 등 경이적인 시즌 성적으로 투수 부문의 타이틀을 모두 독점했다.[12] 후기 우승을 다투는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최종전에서 팀은 패해 우승을 놓쳤지만 신인왕, 그리고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신인 선수로서 MVP로 선정되었다. 당시 그 해의 퍼시픽 리그에서는 3개 팀이 시즌 200홈런을 기록하는 등 리그 전체 1196홈런이라는 굴지의 타격 성적을 기록한 해였으며, 1년 간의 성적이 22승, 평균자책점 2.28은 경이적인 성적이라고 볼 수 있다. 기다에게 끌려가도록 하듯이 그 해 닛폰햄은 퍼시픽 리그 6개 팀 중 유일하게도 팀 평균자책점이 3점대(3.61)를 기록했다. 신인으로서의 최다 탈삼진은 1967년의 에나쓰 유타카, 퍼시픽 리그에서는 1954년의 다쿠와 모토지가 기록한 이래의 쾌거였다. 매회 탈삼진을 시즌 3회 기록하고 있어 이것은 에가와 스구루(1981년)와 대등한 프로 야구 기록이다.[5]시범 경기부터 2승으로 순조롭게 출발했으며, 개막 2차전에 선발 출장하여, 세이부를 상대로 7안타를 맞았지만 완투 승리를 거두었다. 4월 성적은 방어율 0.79, 4승 0패로 월간 MVP에 선정되었다. 헛스윙을 유도하는 속구에 크고 작은 2개의 커브를 던졌으며, 특히 우에무라 요시노부 투수 코치에게 배운 팜볼은 큰 무기가 되었다. 에나쓰 유타카와 동률인 23투구 이닝 연속 탈삼진의 일본 프로 야구 타이기록도 수립했다. 릴리프로도 등판했으며, 무사 만루 상황에서 한큐의 후쿠모토 유타카, 미노다 고지, 가토 에이지를 상대로 모두 속구로 연속 탈삼진을 잡는 묘기를 선보였다. 삼진을 잡고 하는 화려한 가츠 포즈는 이 키다가 원조라고 한다. 그러나, 9월 2일 킨테츠전에서 16안타를 맞고 5점을 뺏겨, 간신히 18승을 거두었지만 186개의 공을 던지는 고전을 하였다. 이후 홈런을 허용하기 시작했고, "공의 가벼움"이 화제가 되었다. 후기 우승이 걸린 10월 7일 킨테츠와의 최종전 (10.7 결전)에서는, 만원 관중을 모은 고라쿠엔 구장에서 3회 초 무사 2루에서 릴리프로 등판했지만, 사사키 쿄스케에게 안타를 맞고 동점, 4회 초에는 3안타를 연달아 맞고 3점을 잃었다. 커브의 제구가 잡히지 않았고, 백업의 실책도 나왔다. 8회 초에 아리타 슈조가 키다에게 솔로 홈런을 날려 6-4로 2점 뒤진 상황에서, 키다는 마운드에 주저앉아 강판되었다.[6] 경기에 패배하여 우승을 놓쳤지만, 다승, 최우수 방어율, 최고 승률을 기록하여 당시 투수 3관왕 타이틀을 독점한 것에 더해, 최다 탈삼진도 기록했다. 시즌 오프는 홍백가합전의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는 등, 텔레비전 출연과 사인회도 열어, 단숨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7]
1981년에도 시즌 10승(9선발승)을 올리는 등 팀의 후기 우승을 제패하는데 기여했고, 롯데 오리온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5차전에 선발로 등판해 승리투수가 되어 팀을 19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서 선발 등판, 히라타 가오루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여 강판당하는 등 승패는 연결되지 않았다. 올스타전에서는 1980년과 1981년에 2년 연속 팬 투표로 선정되었고 1982년은 감독 추천으로 출전했다. 개막 2차전 난카이전에 선발 등판하여 완투 승리를 거두었지만, 구보데라 유지에게 만루 홈런을 맞는 등 9실점하며 시작했다. 포수 가토 도시오에 따르면 "속구도 커브도 작년에 비해 65%", 키다 본인도 "춘계 캠프에서 달리기 훈련이 부족해서, 폼이 잡히지 않았다"라고 말했듯이, 시즌 초반부터 변화구 위주의 투구가 계속되었다. 5월 26일부터 6월 11일 경기까지 4경기 연속으로 KO 패를 당하고 말았다. 10승 10패로 끝나, 방어율은 4.77까지 악화되었다.
그러나 타 구단으로부터의 철저한 견제와 혹사의 영향으로 이렇다할 만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프로 2년차 이후 뚜렷한 활약을 볼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닛폰햄 시대의 팀메이트였던 에나쓰 유타카는 “사랑해야 할 남이었지만 자신의 형태를 너무 고집했다. 그것이 2년차 이후에 주춤한 원인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8] 닛폰햄 시절 감독 오사와 게이지는, "(1981년) 신년회에 갔더니 왠지 한 명만 새빨간 재킷을 입고 튀는 녀석이 있잖아. 순간. 엣하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지. 아니, 키다잖아. 정말. 깜짝 놀랐어. 그 전까지의 키다는 얌전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녀석이었는데. 인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변하는 건가 하고. 걔는 확실히 253이닝 정도 던졌으니까. 피로감은 상당하겠지. 오프는 그 피로를 풀고 내년에 대비해야 해. 게다가 쳐낼 수 없었던 팀은 연구하고 있으니 대처하지 않으면 안 돼. 나도 그 일에 대해 충고했지. 아침부터 밤까지 취재만 받아서 자신을 잃어버렸어. 시범 경기 즈음부터 확실히 나쁜 조짐이 나타났지. 역시 그 이후로 공의 날카로움은 돌아오지 않았어. 2년차의 조정 실패가 키다의 은퇴를 앞당겼다."라고 말했다.[9]
3. 2.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시절 (1986-1989)
1986년 가나자와 쓰구오, 오하타 도루와의 맞트레이드로 다카하시 마사미와 함께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 이적했다.[8] 그 해 시즌은 규정 이닝을 채워 8승을 올렸지만,[8] 이후 3시즌 동안 2승에 그쳤다. 다이요 재적 시절에는 1이닝 4연속 피홈런(1986년 6월 10일), 1이닝 5연속 사사구(1988년 9월 6일), 초구 선두 타자부터 3연속 피홈런(1989년 6월 4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프로 야구 타이기록을 연이어 기록했다.3. 3.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90)
1990년, 기다 이사무는 가모가와 시게하루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주니치 드래건스에 이적했다.[8] 같은 해 11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8]4. 은퇴 이후
은퇴 후 가와사키시에 소재하고 있는 인쇄 회사에 입사하여 근무했다. 닛폰햄 OB회의 회장을 맡았고 경기 시작 직전에 있은 시구식에서 몇 차례나 시구자로 등장하는 등 닛폰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드러냈다. 그 후 인쇄 회사를 퇴직, 데일리 스포츠에서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은퇴한 현역 선수들로 구성된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 삿포로 앰비셔스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에는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인 시나노 그랜드세로우스의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부임 첫 해에는 4개팀 중 3위, 2년 째는 전·후기를 통해서 지구 최하위에 그쳐 2008년 시즌 종료 후 감독직을 사임했다.
2006년, 닛폰햄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을 때, 2군이 있는 가마가야에서 열린 퍼블릭 뷰잉에 게스트로 참가하여 현지에서 소프트뱅크와의 경기에 대한 해설을 했다.
2014년 6월 29일, 후지 텔레비전의 미라이☆몬스터에 출연, 2014년까지 아사히 산업 주식회사의 간호 부문인 [http://abetrading1989.heteml.jp/asahitrust 아사히 트러스트의 여자 경식 야구부]의 감독을 했다는 것을 밝혔다.
2018년 6월 8일, 세-퍼 교류전 DeNA 대 닛폰햄의 경기 전 이벤트 1타석 대결에 등판하여, 다카기 유타카로부터 헛스윙 삼진을 잡았다.[10]
5. 상세 정보
5. 1. 출신 학교
요코하마 제1 상업고등학교(현 요코하마 상과대학 고등학교)를 졸업했다.5. 2. 선수 경력
사회인 시대에는 JFE 엔지니어링의 전신인 닛폰 강관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1980년부터 1985년까지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서, 1990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뛰었다. 1980년에는 19완투, 22승을 기록하여 퍼시픽 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통산 11년 동안 273경기에 출전하여 167선발, 46완투, 6완봉, 60승 71패, 평균자책점 4.23을 기록했다.
연도 | 소속 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승리 | 패배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80 | 닛폰햄 | 40 | 26 | 19 | 2 | 22 | 8 | 4 | -- | .733 | 1030 | 253.0 | 195 | 26 | 89 | 4 | 225 | 77 | 64 | 2.28 | 1.12 |
1981 | 28 | 22 | 10 | 2 | 10 | 10 | 0 | -- | .500 | 720 | 164.1 | 164 | 20 | 81 | 1 | 104 | 98 | 87 | 4.76 | 1.49 | |
1982 | 32 | 23 | 7 | 0 | 6 | 8 | 1 | -- | .429 | 770 | 183.2 | 155 | 20 | 85 | 2 | 123 | 87 | 78 | 3.82 | 1.31 | |
1983 | 21 | 16 | 3 | 1 | 4 | 6 | 0 | -- | .400 | 434 | 97.1 | 99 | 17 | 46 | 1 | 59 | 53 | 52 | 4.81 | 1.49 | |
1984 | 32 | 25 | 5 | 1 | 6 | 11 | 0 | -- | .353 | 766 | 172.1 | 164 | 34 | 98 | 3 | 109 | 110 | 102 | 5.33 | 1.52 | |
1985 | 28 | 4 | 0 | 0 | 2 | 4 | 0 | -- | .333 | 284 | 62.1 | 69 | 10 | 34 | 0 | 57 | 43 | 42 | 6.06 | 1.65 | |
1986 | 다이요 | 39 | 29 | 2 | 0 | 8 | 13 | 1 | -- | .381 | 726 | 171.2 | 156 | 26 | 68 | 5 | 107 | 74 | 69 | 3.62 | 1.30 |
1987 | 15 | 9 | 0 | 0 | 0 | 5 | 0 | -- | .000 | 179 | 37.2 | 47 | 7 | 22 | 0 | 25 | 35 | 32 | 7.65 | 1.83 | |
1988 | 16 | 12 | 0 | 0 | 1 | 5 | 0 | -- | .167 | 255 | 57.0 | 59 | 10 | 28 | 1 | 45 | 34 | 32 | 5.05 | 1.53 | |
1989 | 4 | 1 | 0 | 0 | 1 | 1 | 0 | -- | .500 | 22 | 4.0 | 5 | 3 | 4 | 0 | 2 | 4 | 4 | 9.00 | 2.25 | |
1990 | 주니치 | 18 | 0 | 0 | 0 | 0 | 0 | 0 | -- | ---- | 50 | 9.1 | 18 | 1 | 8 | 0 | 4 | 8 | 8 | 7.71 | 2.79 |
통산: 11년 | 273 | 167 | 46 | 6 | 60 | 71 | 6 | -- | .458 | 5236 | 1212.2 | 1131 | 174 | 563 | 17 | 860 | 623 | 570 | 4.23 | 1.40 |
5.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데일리 스포츠에서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시나노 그랜드세로우스 감독을 맡았다.5. 4. 수상 및 타이틀 경력
기다 이사무는 1980년에 다승왕(17선발승으로 선발승 공동 1위), 최고 평균자책점, 최고 승률, 최다 탈삼진(당시는 타이틀이 아니며,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같은 해 MVP, 신인왕, 베스트 나인,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월간 MVP(4월), 고라쿠엔 MVP상을 수상했다. 1980년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殊勲賞도 수상하였다.5. 5. 개인 기록
기다 이사무는 1980년 4월 6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고라쿠엔 구장)에서 첫 등판했다.[13] 같은 해 4월 6일, 세이부 라이온즈를 상대로 첫 선발, 첫 승리, 첫 완투를 기록했다.[13] 그 해, 4월 25일 롯데 오리온즈를 상대로 첫 완봉승을 거두었으며,[13] 7월 8일 한큐 브레이브스를 상대로는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13] 1980년부터 1982년까지 3회 올스타전에 출장했다.[13]1980년에 투수 3관왕을 차지했는데, 이는 역대 12번째이자 퍼시픽 리그 쇼와 시대 마지막, 그리고 좌완 투수로는 2022년 현재 마지막 달성 기록이다.[13] 같은 해 투수 4관왕을 달성하며 역대 7번째이자 좌완 투수로는 유일한 기록을 세웠다.[13] 또한, 23이닝 연속 탈삼진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일본인 투수 역대 2위, 좌완 투수로는 에나쓰 유타카와 함께 역대 1위, 신인 투수로는 이토 히로미와 함께 역대 1위의 기록이다.[13]
1983년 9월 21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1경기 9이닝 209개의 투구수를 기록하며 프로 야구 기록을 세웠다.[13][14] 1986년 6월 10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는 4타자 연속 피홈런을 허용하며 프로 야구 타이 기록(1이닝 4피홈런도 타이 기록)을 세웠다.[14] 1988년 9월 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는 5타자 연속 사사구로 프로 야구 타이 기록을 세웠다.[13] 1989년 6월 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아키타)에서는 1회 선두 타자부터 3타자 연속 피홈런을 허용하여 프로 야구 타이 기록(사상 3번째)을 세웠다.[13]
5. 6. 등번호
기다 이사무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등번호 16번을 사용했고, 1986년부터 1989년까지는 10번을 사용했다. 1990년에는 45번을 사용했다.참조
[1]
서적
プロ野球人名事典 2003
日外アソシエーツ
2003
[2]
웹사이트
阪神・村上頌樹が新人王とMVPをダブル受賞 セ・リーグ初の快挙に「名を刻めてとてもよかった」
https://www.sanspo.c[...]
2023-11-28
[3]
인터뷰
第一回選択希望選手―選ばれし男たちの軌跡 プロ野球「ドラフト1位」という人生の"その後"
[4]
서적
ヒーロー伝説
文春文庫
1992
[5]
웹사이트
木田勇さん、パだからできた!ルーキーイヤーのタイトル総なめ22勝(2/4ページ)
https://www.sanspo.c[...]
2019-12-26
[6]
서적
熱闘!プロ野球三十番勝負
文春文庫
1992
[7]
잡지
あの時、君は若かった」ルーキー秘話
文藝春秋
2011-03-24
[8]
잡지
1974-1987 日本ハムファイターズ後楽園伝説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1
[9]
서적
球道無頼
集英社
1996
[10]
웹사이트
木田勇氏が高木豊氏と1打席対決!空振り三振奪う
https://hochi.news/a[...]
2018-06-08
[11]
웹사이트
歴代授賞者
http://www.jpsa.jp/a[...]
公益財団法人日本プロスポーツ協会
[12]
기타
[13]
기타
[1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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